

지난 7월 6일,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제43회 대한민국연극제 인천-연극인 100인 토론회’에서 발제에 나선 한국연극배우협회 신바람 상임이사의 첫 마디는 회의장을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다.“지금까지 연극에는‘연극배우’가 없었습니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한국 연극사를 관통하는 가장 날카로운 현실 진단이자, 동시에 가장 절실한 존재 선언이었다.
‘신바람’이라는 이름처럼, 그의 발제는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그러나 그 바람은 결코 시원한 산들바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풍 전야의 고요를 깨뜨리는 거센 돌풍에 가까웠다. 무대 위에선 인간의 존재 조건을 탐구하면서도, 무대 아래에선 정작 자신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연극배우들의 실존적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 순간이었다.
제도적 고아, 연극배우의 4중 고통
신바람 상임이사는 연극배우가 직면한 현실을‘제도적 고아’라는 날카로운 개념으로 규정했다. 연극배우들은 예술인복지법, 공연법, 문화예술진흥법, 예술인권리보장법 등 수많은 법의 틈새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상임이사가 제시한 4대 핵심 문제는 연극배우라는 존재의 본질적 특성을 건드린다. 첫째, 지위 인정 문제다. 예술활동증명 제도에만 의존하는 현실에서 연극배우의 전문성과 활동 특수성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둘째, 근로관계 문제다.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단기·비정규 예술노동자의 특수성은 일반 근로기준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연극배우의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다. 연습실에서의 창작 시간, 무대 위의 공연 시간, 그리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공백의 시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창작 순환 구조인데, 법은 이를 파편화된 근로 시간으로만 본다.
셋째, 사회보장의 문제다.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일부 지원이 가능하긴 하지만, 소득의 불안정성에 비해 그 실효성은 매우 낮다. 이는 구조적인 한계에서 비롯된다. 연극배우의 소득 구조는 일반 직업과 전혀 다르다. 몇 달간의 집중적인 활동 이후, 긴 공백기가 이어지는 특수한 패턴을 현재의 사회보장 제도는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넷째, 창작환경의 부실이다.현재의 정책은 여전히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연습에서 공연, 사후 과정에 이르기까지 창작의 전 과정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책은 부재한 실정이다. 이는 창작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수립된 정책 구조의 한계이자, 예술가의 노동과 과정에 대한 구조적 몰이해에서 비롯된 문제다.
해외의 시선, 한국의 현실
해외 주요국은 예술가 보호를 제도적 권리로 명확히 보장하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인식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은 SAG-AFTRA를 통해 배우의 노동권과 복지를 법제화했고, 프랑스는‘간헐적 예술가 제도’로 불규칙한 노동과 소득 구조를 인정하여 창작 공백기에도 실업급여를 지급한다. 독일은 예술가 전용 사회보험(KSK)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사회보장 체계를 구축했다. 영국은 배우 길드와 복지재단을 중심으로 민관 협력 모델을 실현하고 있으며,일본은 제도적 기반은 약하지만, 연극계의 자율적 관리와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생태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선진국들의 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술가의 노동이 일반적인 노동과 다르다는 인식, 그리고 예술가가 사회에 미치는 공적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출발했다.
반면, 한국은 연극배우 권리보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부족해, 연극배우를 가난한 사람 취급하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바람 상임이사는“배우는 무대 위에 있지만, 제도 안에는 없다”고 지적하며, 한국 연극배우 권리의 근본적 공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연극진흥법, 배우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
신바람 상임이사는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연극진흥법' 제정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기존 연극계 논의와 결정적으로 달랐다. 기관 설립이나 예산 확보에 집중된 기존 논의와 달리, 그는 연극배우를 중심에 둔 제도적 혁신을 주장했다.
“배우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권익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연극정책도 진정한 가치를 담기 어렵다”는 그의 말은, 연극정책의 방향을 사람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건물을 짓기 전에 그 안에 살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가 제시한 연극진흥법의 핵심 내용은 네 가지다.
첫째, 연극배우의 법적 지위 명확화다. 공연예술의 핵심 창작자이자 예술노동자로 정의하고‘연극배우 특별조항’을 신설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법적 정의가 아니라, 연극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출발점이다.
둘째,‘지속형 창작안정지원제’도입이다. 기본소득이 아닌 한국형 창작 안정망 모델을 개발하여 실질적 생계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연극배우의 특수한 시간 구조를 인정하는 제도적 장치다.
셋째, 표준계약서의 법적 근거 마련과 사용 의무화다. 이를 통해 불공정 계약을 방지하고 근로 보호를 강화해 착취 구조를 근절한다. 이는 연극계의 전근대적 도제 관계를 현대적 계약 관계로 전환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넷째, 공공지원사업에서의 연극배우 보호 의무화다. 공공극장 및 국고 지원사업에 배우 보호 조항을 필수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곳에서부터 배우 보호의 기준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술과 인간 존엄의 교차점
신바람 상임이사의 발제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예술과 인간 존엄을 잇는 철학적 통찰이었다.“예술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그 예술을 몸으로 실현하는 이를 보호하는 일은 사회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공적 책무”라는 그의 언급은 예술가 보호를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 인간 존엄의 문제로 승화시킨다.
이는 예술가의 존재 조건이 곧 예술의 존재 조건이며, 나아가 예술의 존재 조건이 사회의 정신적 건강과 직결된다는 심오한 인식이다.연극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진실을 증언해 왔듯, 이제 사회는 그들의 존엄을 증언하는 새로운 책임 앞에 서 있다.
신바람 상임이사가 제기한 이 통찰은, 예술을 향한 사회적 책임의 근본적 재정립과 함께 예술가의 권리보장을 촉구하는 시대적 요청이자, 문화 공동체의 건강성을 확보하는 필수 조건임을 일깨운다.
정책적 임팩트와 실현 가능성
신바람 상임이사의 제안은 정책적으로 강력한 임팩트를 가진다. 무엇보다 연극진흥법이라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연극배우의 특수성을 법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는 기존 예술인복지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향적 접근이다.
또한, 지속형 창작안정지원제는 기존 공공기관, 단체에서 작품 중심 프로젝트성 지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다. 연극배우의 불규칙한 소득 구조를 인정하고, 창작 공백기에도 안정적 생계를 보장하는 것은, 창작환경의 근본적 개선을 의미한다.
표준계약서 의무화는 연극계의 오랜 숙원이다. 구두 계약이나 불공정 계약에 시달려온 연극배우들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을 제공할 수 있다. 공공지원사업에서의 배우 보호 의무화는 공적 자금의 사용에 윤리적 기준을 세우는 의미가 있다.
새로운 연극사의 시작
신바람 상임이사가 마지막에 던진 "연극배우 없는 연극은 없습니다. 연극배우의 권리 없는 연극진흥도 없습니다”라는 선언은 한국 연극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명제다. 이는 연극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자, 연극계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적 외침이다.
그의 발제는 단순한 제도 개선 요구를 넘어, 연극이 무엇인지, 연극배우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가 예술가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이는 한국 연극계가 성숙한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와 같다.
사회적 상상력의 확장
신바람 상임이사의 제안은 단지 연극계의 문제 제기를 넘어, 우리 사회의 상상력과 문화적 상식을 재구성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예술가를 보호하는 일이 단순한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하는 공적 책임이라는 인식의 전환은,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필요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연극배우의 권리보장은 곧 문화적 다양성의 보장이며, 창작환경의 개선은 사회 전체의 상상력과 공감 능력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무대 위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해온 연극배우들이 무대 아래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사회야말로, 진정 문화적으로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신바람 상임이사가 불러온 이 바람이 단순한 외침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변화의 바람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인천에서 시작된 이 목소리가 서울로, 전국으로 그리고 정부와 국회로 이어져 제도와 정책을 움직이는 실질적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연극배우들의 존재 증명이야말로, 이 사회가 인간과 예술, 존엄과 창조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성숙도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시민과 함께 만드는 변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연극배우 없는 연극은 없다”는 외침은 이제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온 연극배우들이 무대 아래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들
관객으로서 우리는 연극을 관람할 때 그 작품이 배우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공연 티켓을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연극 생태계를 지원하는 일이지만, 이제는‘어떤 연극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소비가 필요하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지역의 공공극장과 문화재단이 연극배우 권익 보장에 앞장서도록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라면, 그곳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문화적 인식의 전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다. 연극배우를‘가난해도 예술 하는 사람',‘취미로 하는 사람', ’유명/무명’으로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 전문성을 가진 창작 노동자로 인정하는 문화적 성숙이 필요하다.
예술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사치품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품이다. 팬데믹 시기에 우리가 절실히 깨달았듯이, 예술과 문화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예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의 문화적 삶을 지키는 일이다.
변화의 시작점
신바람 상임이사가 인천에서 불러온 이 바람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연극진흥법 제정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절실하다. 국회의원들에게 연극배우 권익 보장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함께 알리고, 지역 문화예술정책에 목소리를 내며, 무엇보다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해온 연극배우들이 무대 아래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문화 강국의 모습이다.
이제 외침을 넘어 행동으로, 선언을 넘어 실천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연극배우와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변화의 첫걸음이 여기서 시작된다.